무무당의 계종야록(鷄宗野錄) << 전편>>

계종야록(鷄宗野錄) 1~26회 전편을 게재합니다.

편집팀 | 기사입력 2022/05/22 [11:34]

무무당의 계종야록(鷄宗野錄) << 전편>>

계종야록(鷄宗野錄) 1~26회 전편을 게재합니다.

편집팀 | 입력 : 2022/05/22 [11:34]

 계종야록(鷄宗野錄)

 

▲ 뉴스콕DB     ©

 

/애련哀憐

 

계종(鷄宗)은 민국(民國)의 열한 번째 왕으로 나라가 민국으로 문패를 바꾸어 신장개업(新裝開業)을 한 후 왕위(王位)에 오른 첫 여자였다즉위 전 그녀는 재야에 머물며 오직 궁()만을 바라보며 작은 수첩으로 신공(手帖神功)을 갈고 닦던 옛 공주였다공주의 이름은 애련(哀憐)이었다.

 

반도(半島)의 긴 강 네 개(四大江)를 갉아먹기에 이()가 닳아버린 선왕(先王서종(鼠宗)이 더는 먹을 수 없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아무런 미련이라곤 없이 표표(漂漂)히 궁을 떠나 압구정 넘어 논현(溣峴)에 자리를 잡은 계사년(癸巳年이월(二月). 애련이 와궁(瓦宮)으로 돌아와 여왕이 된 것이다계종(鷄宗).

 

즉위 전까지 애련은 수첩공주(手帖公主)로 불리며 고이 행세 해왔다뭇 백성들은 돌아온 그녀가 강호를 떠돈 햇수가 십팔(十八)년이라고 했다그녀는 원래 육무림(陸武林상장군(上將軍)의 딸로 태어났으나 역성혁명을 일으킨 상장군이 왕조(王朝)를 탈취한 뒤 인산(仁山아래 궁궐(宮闕)로 들어 희종(熙宗)이 되자 자연스럽게 공주가 되어 궁에서 크고 자랐다그 기간이 또한 십 팔년이었다희종 치하 백성들은 오로지 희종을 유일한 최고 통치자로 알아 그를 통()이라 찬양해 불렀으며 의당 그런 것으로 알았다세상을 바삐 살다 간 백성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통의 치하에서 살다 세상을 마치기도 했다.

 

계종이 태어날 즈음 남선(南鮮육무림의 상장군으로 있던 그의 아비가 북선(北鮮)에 선()을 대 모반을 도모했다는 죄로 옥()에 갇힌다남선과 북선이 한바탕 치고받은 동란(動亂)이 일어나 나라가 삼년혼돈에 들기 전이다옥에 든 아비는 곧 그와 함께 암약했던 작당(作黨)의 동료들과 조직도(組織圖)를 상세히 그려 넘겨 목숨을 건사 간신히 소생(蘇生)한 후 무림에 다시 돌아온다은인자중(隱忍自重호시탐탐(虎視耽耽세월을 도모하던 상장군은 급기야 도성에 봄기운 피어난 음(사월(四月미명(未明)에 아리수를 도강(渡江나라를 쟁취 주머니에 넣는다.

 

/희종

 

희종(熙宗)은 원래 상도(商道상모(上毛)사람으로 그를 임신한 사실을 안 그의 어미가 높은 나뭇단에서 뛰어 내리기다린 간장 마시기 등을 통해 뱃속의 그를 지우려 했으나 이를 모두 물리치고 꿋꿋하게 태어난 사내였다그의 어미가 그를 배에서 지워내려 한 것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산야(山野)를 헤매어야 하는 가난과 이미 열()에 이르는 많은 자녀들을 가진 때문이었으며 또한 이미 나이가 사십을 넘은지라 민망한 수치를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었기도 했다이미 그의 큰형의 큰 아이가 그보다 먼저 세상에 나와 있었다나라의 대다수 백성들이 당시그렇게 살았다.

  

 

소년 희종이 태어날 당시 나라는 제국(帝國)이 오래 전 쇠망한 터로 정유(丁酉)년 명랑의 패전으로 물러났다 다시 쳐들어 온 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植民地처지로 나라의 이름은 조선(朝鮮)이었다.

 

식민지라 했으나 정작 왜는 어느 문장이나 담화에도 식민이란 말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그들 속으로는 조선을 폐멸(廢滅시켜버리겠다는 저의를 깊게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왜는 웃는 얼굴로 다가와 등목을 후려치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의 등격술(蹬擊術)과 사금파리를 갈아 한 숟갈씩 밥솥에 섞어 넣는 증란술(烝爛術)을 교란책으로 교묘하게 섞어 썼다.

 

조선폐멸의 발톱을 감춘 왜는 식민통치를 위해 총독(總督)을 내보내 그가 다스리는 땅을 외지(外地)라 칭()했다저들의 땅은 본토(本土)였으며 내지(內地)였던 것이다조선과 왜는 안과 밖일 뿐 한 덩어리라는 것이었다외지는 크게 남선(南鮮)과 북선(北鮮), 그 밖의 탐라(耽羅), 우산국(鬱陵島), 간도(間島등이 조밀하게 각축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이를 떠돌며 유랑했다유랑은 바다건너 연해주(沿海州)까지에도 이르렀다조상으로부터 내려 받은 땅에 터를 잡고 사는 백성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 온 산하와 백성들이 피폐(疲弊)하고 핍진(乏盡)한 시절이었다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이 어디에서든 얼마나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며 한 몸 덩어리임을 외치며 외지 선인(鮮人)들을 가르쳐 나갔다그러면서 내지의 속살을 찌워나가기 시작했다새로운 문물을 가져다 풀어 눈과 입맛을 들이게 한 다음 곧바로 높은 체험료를 되돌려 챙겨갔다강산의 곳곳에 길을 뚫거나 넓혀 수탈의 속도를 널리 높여갔다조선 곳곳에 신작로(新作路)가 혈관처럼 뻗쳐 파고들었으며 그 길을 따라 강산의 물산 물화들이 끌려나와 속속 내지로 빨려 들어갔다더하여 섬나라였던 왜는 조선 사람이 하얀 옷을 즐겨 입는 하얀 마음씨를 고깝게 여겨 백의토벌책(白衣討伐策)을 비롯해 온갖 치졸한 사술(邪術)을 조선에 쏟아 부었다백의토벌이란 흰 옷을 입은 조선인이 보이면 즉시 하얀 옷에 먹물을 쏟아버리는 아주 천박한 하질(下質)의 술수까지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천박함의 끝은 여인들의 하얀 속치마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시국이나마 소년은 무럭무럭 자라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친 후 상()의 수부(首府달구벌로 올라가 소년무사들을 양성하는 사범(師範)에 들어갔다사범은 학비와 식비 등이 무료에 가깝고 일체의 수련비를 내지에서 다 부담했다식민의 나라에서 식민의 자녀가 해볼 수 있는 최고의 교육 이었고 그래서 당시 사범에 들어가는 인재는 군(단위 고을에서도 하나나 둘 정도여서 사범에 드는 소년들은 영재나 수재로 떠받들어 졌다사범에서는 소학(小學)의 학동들을 가르치기에 필요한 셈본율동창가체육들을 가르쳤고 소년은 이를 배웠다훈도가 되어 소림(小林)의 학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과목과 학습들 이었다각 과목과 학습의 모두가 내지의 지침에 충실히 따랐다사범에서 수련하는 동안 소년은 청년(靑年)이 되었고 사범시절 청년 희종은 평범하고 평범한 시골 유학생으로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훗날 그가 권좌에 오르고 긴 시간 철권을 시위 힘을 뽐내면서 그에 대한 일화가 미화(美化칭송(稱頌되었으나 더 훗날 더 뜻이 깊은 사가(史家)들은 이를 가벼이 여겨 웃었다소싯적 영롱하지 않은 장부가 하늘 아래 어디 있던가.

  

 

사범을 마치고 깊은 산골 소학에 훈도(訓導)로 부임한 청년은 나라의 꼴이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식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의 혈기를 눌러 앉히기 어려웠던 것이다여기에 당시의 풍습대로 부모의 강권에 따라 잘 생기지도 않은 촌녀(村女)와 혼인까지 치러 이른 나이에 딸을 얻기까지 했다그의 첫 여인이자 부인이었던 촌녀의 이름은 남순(男順)으로 무던하고 튼튼해 농사일이나 집안 일 만큼은 어느 촌부만큼 잘해냈다하지만 훈도질은 물론 살아가는 세상사 무엇 하나 마음에 시원하게 차지 않은 청년 훈도는 늘 주위와 동떨어져 외로 지내 돌았다공일(休日)이 되어도 처자가 있는 본가 가기를 띄엄띄엄 꺼려했다학당에서도 본토에서 건너온 왜인(倭人훈도는 물론 같은 선인(鮮人동료 훈도들과도 어울리기를 지극히 꺼려했다어쩌다 가끔 술이나 한 잔 어쩔 수 없이 나눌 뿐 늘 수심에 가득 차 무언가를 골똘하게 겨누는 인상이었다고독한 훈도는 홀로 풍금을 타거나 피리를 연주하며 산촌의 시간들을 베어냈다.

 

답답하게 홀로 시간을 죽여 가던 청년 훈도의 눈은 어느새 대륙(大陸)을 겨누었고 드디어 훈도의 답답한 현실을 찢어낼 유일한 방도를 찾아 어느 날 북방(北方)으로 길을 오른다그의 북행(北行)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주위의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주도면밀한 놀라움이었다북방의 심장 봉천(奉天)에 당도한 그는 대뜸 만국(滿國)의 군관을 양성하는 군관학교(軍官學校)에 지원 합격한다훈도가 사관(士官)이 된 것이다.

 

만국은 왜가 중원(中原침탈을 목표로 위해 조립한 교두보인 왜의 괴뢰국(傀儡國)으로 봉천은 신경(新京)으로 이름을 바꾸어 그 수도(首都)가 되었다신경으로 중원(中原)의 여러 부족(部族)과 산족(散族)들이 떠돌며 모여 들었다이 때 부터 숨겨있던 그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하며 그는 날개를 단다.

 

기재(奇才)가 뛰어난 사관은 봉천의 사관들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뽐내 용약 내지의 본토사관학교에 뽑히기에 이른다본토에서도 월등한 기질을 나타낸 청년 사관은 본토사관학교를 우등(優等)으로 마치고 왜군(倭軍)의 촉망받는 장교(將校소위(少尉)가 되어 만국(滿國)으로 다시 돌아온다왜황(倭皇)이 친히 내린 금장시계를 손에 차고 돌아온 소위는 만국에서 왜국의 충실한 장교로 민족(民族)과 부족(部族)을 가리지 않고 부랑(浮浪)을 분쇄 왜국을 향한 충성에 열성을 다해 차츰 이름을 높여 날린다그리고 중위(中尉)가 된다.

 

욱일승천하던 왜()가 구라파 열강들과 심하게 맞장을 뜨다 칼과 창이 꺾이고 기어이 포신(砲身)을 내리자 만국은 없어지고 왜는 조선에서 물러나 내지에 감금된다해방(解放)이라고 그랬다하지만 이때부터 한 덩어리였던 조선은 남선과 북선으로 갈라 나눠지며 북선에는 로씨아를 이은 쏘비트가 남선에는 연합국인 아미리가 진주(進駐)하게 된다식민의 사슬을 벗어나자 나라가 동강나 나눠진 것이다정유년(丁酉年)이 또 돌아온 것이다아시아 일대를 유랑해야 했던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이 떠돌다 죽었고더러는 돌아오고더러는 소식이 끊어졌다그랬어도 중위(中尉)는 살아 남선으로 소리 없이 돌아와 잠시 향리에 몸을 은신 시절을 살피다 뒤죽박죽이던 남선의 육무림(陸武林)에 몸을 의탁한 채 또 다시 시절을 노리고 있었다중위는 남선의 무림에서 상장군까지 오른다.

  

 

남선(南鮮)의 시국이 좀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엉망으로 돌고 백성들도 가난의 도탄에 빠져 혼미하게 강을 떠내려가고 있을 때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상장군은 드디어 별기군 당 천()을 모아 용약 궐기(蹶起), 을미(乙未)년 오월 열엿새 미명에 아리수를 건너 도성을 장악하고 남선 전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선은 서경(西京)에 본진(本陣)을 차리고 암약 은신하고 있던 북선(北鮮)과 삼년간의 내전(內戰)을 거치고 난 뒤라 조정도 백성도 강산도 모두 얼이 빠져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누구도 나서서 무엇도 어쩌지 못했다나라를 챙긴 상장군은 그날 아침 동이 트자 검은 안경으로 매서운 눈매를 가리고 한성부청 앞에 나타났는데나라 밖에서는 그를 선글라스 박(또는 나이방 박()이라고 불렀다.

 

국권을 쟁취해 새 왕조(王朝)를 열어젖힌 희종(熙宗)은 혹은 다독이며 혹은 채근하며 우선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희종 치하 이십여 년 동안 남선은 어느 정도 급한 불을 껐고백성들의 먹성과 입성도 제법 나아졌다백성들은 어떻든 희종 치하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살기가 그만그만해졌다고 그를 칭송했다희종은 왕위에 오르자 말자 그가 본토 사관학교에 다닐 때부터 유심히 봐 두었던 유신신공(維新神功)과 새말신공을 펼쳤다지붕에서 볏짚 내리기마을안길 넓히기이른 아침 골목 쓸어내기쥐꼬리 잘라 팔기(輸出立國), 빈산에 나무심기(山林綠化), 고등 학동에 요대 각반 채우기(敎鍊), 긴조(緊急措置), 파병(越南派兵등이 그것들이다이 밖에도 희종이 펼친 신공은 많고 많아 훗날 강호 무림의 처처(處處)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이 밖에도 희종이 펼친 무술은 혁명공약(革命公約), 반공국시(反共國是), 농공병진(農工竝進), 공화유신(共和維新), 수출증산(輸出增産), 자주국방(自主國防), 경제제일(經濟第一), 총력안보(總力安保), 서정쇄신(庶政刷新), 계엄위수(戒嚴衛戍), 등 무시무시한 공술(攻術)들이었다.

 

당시 희종의 치세를 뒷받침 한 세력은 왕이 태어나 자랐던 상도(尙道)를 기반으로 한 경인(慶人)과 무인(武人)들 이었다기타 라인(羅人)들이나 청인(淸人), 북인(北人출신들은 조정은 물론 강호(江湖)의 어디에서도 큰 힘을 쓰지 못했고힘이 되지도 못했다명함 한 장을 내밀지 못했다.

 

/계종(鷄宗)

 

계종(鷄宗)은 희종(熙宗)의 1남 2녀 중 장녀로 소싯적부터 궁()에서 살며 부왕(父王)의 통치술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다.

 

공주는 희종의 왕비 옥천황후(沃川皇后(씨가 서경(西京)의 사주를 받은 간자 왜 교인(僑人광세(光世)의 흉탄에 중인환시 시해(弑害)되자 유학 중인 서란(西蘭)에서 급거 돌아와 어미의 국장을 치러낸 뒤 희종이 기밀원의 수장에 의해 척살되기까지 어린 나이임에도 왕비의 역할을 당차게 해냈다황후가 갔어도 백성들은 오랜 세월 옥천황후를 웅녀(熊女)라 부르며 애련을 통해 황후를 그리며 그를 곱게 추모했다.

  

웅녀는 내전이 한창이던 시절 상장군과 혼인을 하여 후처가 된 다음 그를 곁에서 보필 황후에 오른 불세출의 여인 이었다그녀는 높은 트레머리로 백성들을 가까이 하는 모습을 보여 멀리 백성들이 그를 가까이 따랐다또한 그녀는 왕이 침전에 들면 백성들의 소리를 전하기에 저어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왕과 육탄전을 불사 왕의 용안(龍顏)에 상처를 그어 남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그런 그녀가 왜인 간자의 흉탄으로 시해된 것이다.

 

황후의 상여가 궁을 나서 아리수 건너 동작(銅雀)에 이르기까지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장안의 모든 백성이 몰려나와 눈물을 훔치며 통곡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사가(史家)들은 이때부터 왕의 총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총기를 잃은 왕은 독단으로 치달았고 정사(政事)를 마친 밤이면 크고 작은 연회(宴會)를 열어 허전함을 달랬다저자의 여염으로부터 어린 무희(舞姬가희(歌姬)에 이르기까지 많은 여인들이 왕의 곁에서 그의 고독을 달래주어야 했다황후가 그렇게 떠나가 묻힌 후희종 역시 측실들의 권력다툼으로 왕실 측근 실세와의 술자리에서 흉살되고 한 세대쯤 지난 후 공주는 부왕 희종의 정치적 지리적 기반인 경인(慶人)의 세력을 업고 서종(鼠宗)에 이어 옥좌에 올라 환궁한 것이다계종 원년(元年계사년 이월이다.

 

부왕 희종이 시해되고 희종의 호위무사 출신으로 왕의 막부에서 세작들을 풀어 병부(兵部)를 관리하던 대장군(大將軍공두(空頭)가 음험한 교술(狡術)로 회오리치던 조정과 왕권을 주도면밀한 전복술(顚覆術)로 수습 찬탈에 성공한다나라가 뒤집힌 것이다공두는 희종이 총애하던 랑소림(郞少林)의 랑도(郞徒출신으로 소림을 마치고 육무림에 들면서부터 왕의 지근에 머물며 왕실과 궁궐 조정의 움직임을 손바닥 안에 배어 들여다보고 있음이 넘쳐 권력을 담은 칼의 진행 방향을 누구보다 샅샅이 알아 왕의 기밀금고(金庫)까지 훤하게 익혀두고 있던 터였다.

 

공두는 칼을 서서히 갈았으며 조금도 서두름이 없었다교술(狡術)은 본시 그런 공술(攻術)에 속한 본술(本術)이다혼미한 시국의 안개 속이지만 권부에 익숙한 그의 눈에는 칼끝이 겨눠 흘러감이 훤히 보였던 것이다공두의 세력은 삽시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단단해져 누구도 그를 저어할 수 없었다나라의 장래가 이토록 곤두박질 쳐감에 무등(無等)의 백성들과 도성의 여러 학동 유생(儒生)들이 목숨을 걸고 나섰으나 공두는 그 목숨들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거두어 주는 냉혈함도 과시해 주었다백성의 목숨들이 깔린 길을 수레로 지난 공두는 거리낌 없이 옥좌에 오른다공두 역시 경인과 랑소림(郞少林)을 기반으로 희종을 이어 와궁에 머물며 강산 한 바퀴를 큰 탈 없이 돌았다.

 

궁궐을 나온 공주가 도성의 남신당과 성북을 전전하는 동안 남선은 공두 대장군과 그의 랑 동습(同習)인 절친 소태(素泰상장군이 앞뒤를 이어 주고받으며 나라를 십오 년 넘게 사이좋게 주물렀다.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든 공주는 긴 시간 무엇이든 꼼꼼히 적어 새기는 수첩술(手帖術)을 개발 수련하면서 세작들을 상도 근역에 풀어 호시탐탐하며 공술(攻術연마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그러면서도 만약의 날을 대비 북선에 선()을 대 친히 서경에 다녀오는 용의주도한 책술을

 

펼치기도 했다서경을 찾은 그녀는 아비와 함께 서로서로 암암리에 도움을 주고받으며 북선을 지배해 온 북선의 우두머리 성일(星日)의 왕세자(王世子군일(君一)과 만났다이때 북선은 강산을 다섯 번이 돌아 넘도록 오로지 통째로 압제해 온 두목 성일이 묘향특각에서 한 밤중에 급서(急逝)한 뒤 세자 군일이 권좌를 넘겨받아 변함없는 독재를 이어가던 참이었다.

 

서경외술(西京外術)로 내외 무림의 간()을 본 공주는 안으로는 은밀하게 사병(私兵)을 양성 훈련시키며 권토중래(捲土重來)의 발길을 가속해 나갔다강호 무림의 어느 누구도 이를 눈치 채어 이를 심히 살펴보지를 않았다이렇듯 틈틈이 원교근공술(遠交近攻術)로 자신의 존재를 한 번씩 반짝거리는 공주의 칼끝은 이제 곧 궁을 향하고 있었다부왕을 그리는 그의 백성들이 곳곳에 은신하고 있었기에 도모함이 수월했으며 그러기에 애련은 그만큼 마음을 급하게 서둘렀다.

 

동습 소태 상장군에게 궐위를 이양한 공두는 겨울 한철을 백담(白潭)에 기거하는 퇴막술(退幕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 다음 봄이 되자 본궁(本宮)에서 가까운 사궁(私宮)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소태는 특유의 음공(音功휘파람신공(神功)을 구사하며 재위 오년을 무무(無無)하게 넘긴다강산이 절반을 돌던 소태 재위 말(). 은인자중 하던 공주는 드디어 달성골을 발판으로 궐기에 성공 경인들의 집단을 접수여의회(汝矣島)에 입성하기에 이른다쓸개를 씹어 삼키기 십 팔년의 세월을 마침내 견뎌낸 것이다여염의 백성들 누구도 공주의 공술을 눈여겨보지 않았으며 그녀가 무림에 뛰어든다는 것을 상상해 본 사람들이 없었다다만희종의 총애를 받았던 시복들과 상도(尙道)의 가까운 백성들만이 은밀하게 이를 축수해 왔음이 밝혀졌다옛 궁의 나인 시복들과 상도의 가까운 백성들이 일어선 공주를 찬양하며 목을 놓아 울부짖었다.

 

공주가 여의회에 들어 몸을 나타내 도성에 돌아온 당시는 소태가 용상(龍床)에서 내리고 라인(羅人하중(荷中)이 남선의 권좌를 쟁취 치세를 이끌던 때라 경인(慶人)들은 모두 일시에 더욱 더 공주의 품을 파고들었다공주는 그들을 일단 따스하게 품었다그들은 공주를 보며 옥천황후가 현시한 것이라고 떠들어댔다서서히 공주의 눈에 궁이 보였다.

 

하중은 남도를 건너 황해바다가 왼쪽으로 물길을 틀어 젖히는 하섬(荷島)에서 태어나 뭍으로 나와 나무포에서 초공(初功)을 튼 후 민무림(民武林)에 들어 본 무공을 닦아온 라인 출신으로 평생 권좌를 위해 세계를 유랑하며 떠돌던 단기(單騎)의 검객(劍客)으로 일생을 무협(武俠)에 잔뼈를 굴려온 검자(劍者)였다민무림의 고수였던 하중은 각종 시연에서 희종을 상대로 한 검투에서 여러 차례 깊은 자상(刺傷받아 불구로 부랑하던 눈물의 검자였다하중은 희종이 권좌에 오를 때부터 이를 고깝게 여겨 원수로 지내 끝내는 철천지원수가 되어 희종의 호위무사 공두가 권력을 잡은 후 마침내 공두로부터 사약을 받기도 했던 풍운의 검객이었다.

 

그런 검객 하중이 만고풍상의 시절을 거친 다섯 차례의 본연을 거친 끝에 우여곡절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던 날 하중은 백성들을 향해 눈물을 흘렸고 이를 본 백성들도 역시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하중이 왕위에 올라 오년강산은 또 돌고 돌아 하중이 같은 민무림(民武林)의 단검객(單劍客하상도인(下商道人영무(泳無)에게 권좌를 물리고 나라는 무심한 세월강산 한 바퀴를 돈다.

 

영무가 이것저것 새 검술 개발과 시연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버린 후뒤이어 경인(慶人영포(迎浦)가 라인(羅人순동(淳童)을 단 일합(一合)에 거꾸러뜨리고 가벼이 권좌를 재탈환하자 경인들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영포가 서종(鼠宗)이 된 것이다.

 

영포의 등장이야말로 무림으로서는 개벽이었다영포는 본시 무림과는 멀리 떨어진 저자 토건가(土建家)의 집사 출신으로 그가 무림시연(武林試演)에 나설 것이라고는 일찍이 누구도 내다보지 못한 사건이었다영포가 본연(本演)에 나서기로 마음을 굳히고 새 창과 칼을 다듬어 저들의 본진(本陣화무림(火武林)의 대표 선발 시연에 도전 했을 때 그 상대가 바로 방금 전 여의회에 들어 화무림에 몸을 의탁한 애련공주였다화무림은 전통적으로 막강하고 무시무시한 화공(火攻)을 무림의 기본공술로 뼈대를 삼을 만큼 어마어마한 재화를 곳곳에 쌓아 굳건했다그들의 본진은 상도에 있었으며 화()는 돈()이었다.

 

이때화무림의 대표가 된 영포를 상대하러 최종 본연(本演)에 오른 민무림(民武林)의 대표 검자 상고수(上高手라인(羅人순동(淳童)은 단신에 긴 칼 하나만을 딱 차고 무대에 올라 있었는데시연(試演)이 허무하게 끝난 후일그 칼집에는 칼 대신 작은 손나팔이 하나 있었을 뿐이라는 말이 회자됐다그 만큼 당시의 본연이 순식간에 일방적으로 끝나버린 시연이었던 것이다어떻든 영포가 서종(鼠宗)이 되었다옥좌에 오른 서종(鼠宗)은 오랜 흉중을 드러내 작심한대로 서둘러 남선의 큰 강 몇 개를 치밀하고 왕성하게 갉아냈다나아가 서종은 멀리 바다 건너 오지에까지 측실들을 내보내 땅속에 묻혀있는 광물들을 훤히 꿰뚫어 거기에도 빨대를 꽂아두기에 소홀하지 않았다여러 백성들이 이를 의아하게 여겨 왕에게 상소를 하면 왕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하며 그러거나 말거나 였고 백성들 또한 일부는 그러거나 말거나 였고 일부는 그러려니 했다그와 가까운 영일 바닷가 이웃들과 토건가에서 함께 잔뼈를 굴려온 여러 급수의 집사 십장들이 횡재했다그들은 오랜 동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기나긴 세월 몇 번의 천신만고 경연을 거치고 시간을 베어내며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세월을 홀로 씹어 삼키며 마침내 즉위에 오른 계종은 부왕으로부터 어깨 넘어 배운 바를 떠올리며 마음껏 통치술(統治術)을 펼친다무엇보다 왕은 조정의 신료대신에 무인(武人)과 법사(法事)들을 중용했다여느 선왕들과는 달리 즉위 초반의 우물쭈물함도 없이 즉시 의연했고 당당해 백성들도 첫 여왕에 대한 향기를 기대했다조정과 궁궐의 요직에 무인들이 바람처럼 들어 하나 둘씩 자리를 차지했으며 기찰(箕察출신 법사들도 은밀하게 스며들어 용의주도하게 제자리들을 틀어쥐고 왕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기에 너나없이 목숨을 내놓아 뽐내었다눈물겨운 충성이었다.

 

선왕(先王서종(鼠宗)의 측실과 조정에 국방(國防)에 털끝도 스쳐본 적이 없는 자들이 득실거리며 거들먹댔던 것에 치를 떤 여왕은 이를 단호히 분쇄하며 무인들을 철저하게 중용했다서종의 허무맹랑 무지몽매에 할 말을 잃고 살았던 백성들도 역시 공주라며 칭송을 서둘렀다왕의 딸이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었다나아가 계종은 무엇보다 궁 언저리에 붙어 일생을 지내 경륜을 높이 쌓은 노회한 자들을 친히 곁에 두었는데 고희를 넘긴 법사 거춘(巨春)을 도승지로 쓴 것만 보아도 그랬다그밖에 승지들이며 영의정기밀원장판서 참판 등 곳곳에 법사들을 가까이 두어 친하게 부렸다또한 계종은 아랫것들의 범접을 원천 봉쇄 했는데 이는 왕족

 

다운 품위였다왕후장상의 피가 엄연하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이런 왕의 뜻을 가까운 아랫것들은 하늘처럼 떠받아 따랐다.

 

궐내 도승지는 물론 조정의 영의정이나 대신들 간에도 여왕의 얼굴을 가까이 본 자가 많지 않았다왕은 편전에 들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침전 앞으로 무거운 장막을 드리워 가려 쳤다저자에는 십상시(十常侍), 문고리 삼인방(三人幇등이 왕의 막전에서 이를 차단 점검한다는 말이 빠르게 돌았다궁 밖의 사정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때쯤왕의 신공은 하늘에 당도해 여왕의 눈에서 빛이 발하는 광술(光術)이 쏘아진다는 말이 궐 밖으로 흘러 나왔다여왕의 눈에서 쏘아지는 광선을 받아 쪼인 승지 판서들이 그 자리서 혹한 신열에 떠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왕의 도술(道術)이 어마 무시에 도달한 것이었다그러거나 말거나 궐내는 고요히 평화로웠고 조정의 신료들은 그들 나름대로 오래 단련해온 굽신술을 쉼 없이 닦았다언제나 그렇듯 가문의 먹거리를 업()으로 한 민첩한 관아의 아전들과 무인 법사그리고 그들과 음양으로 연결돼 도생하던 발 빠른 일부 백성들은 그녀의 효심에 격양가를 불러 찬송했다태평성대를 바랬던 것이다하지만 생각이 깊고 깊은 궁민사가(窮民史家)들은 이때 이미 왕의 딸이었던 사람이 여왕이 되면서 나라는 망조(亡朝)에 들었다고 사초(史草)에 적었으며 야()의 민무림(民武林)도 서둘러 정신을 챙겨 전열정비에 들어 공술 연마에 전력을 다하며 닥쳐올 공성전(攻城戰)에 대비했다.

 

/망조(亡朝)

 

계종이년(二年갑오(甲午)년 사월(四月)보름달이 지자말자 남녘 라수영 팽도 앞 맹골 바다에 학동 삼백을 포함 백성 사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제물포에서 탐라를 향해가던 객선 삼월호가 돌연 뒤집혀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 잠긴 것이다이로부터 하수상한 돌풍의 세월이 온 나라를 휘감아 덮친 것이다왕조도 함께 끌려 침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삼월이 그 꽁무니만 뒤집어 하늘에 들어 내놓은 채 바다 속으로 몸을 감추어 전복된 후 끝내 꽁무니를 사려 완전히 가라앉는 모습이 수상기(受像機)로 시시각각 중계되며 온 나라 온 백성에게 속속들이 알려졌다저마다 나라에 액운이 끼었음을 간파하고 계종의 박복과 실정을 짖어댔다천주국(天主國교황(敎皇)이 조용히 찾아와 이를 애통해 했다온 세상이 도가니처럼 들끓어 아우성으로 몇 날 며칠을 지새워도 계종을 왕으로 밀어올린 화무림 만은 오직 조용했다.

 

사실계종 즉위 초부터 남선 안에는 조정이 여왕 측실들의 전횡에 계통과 권위를 이미 잃었고 더하여 왕이 도통 정사를 소홀히 한다는 말이 널리 퍼져 떠돌았다왕이 편전에 좀체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이다일주일에 한두 번 그것도 점심 후 산보하듯 잠깐 나왔다 처소로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대소 승지(承旨)들이나 참판(參判판서(判書)들이 시급하고 간절하게 왕을 알현 하고자 해도 여왕은 이를 매우 불편해 하고 볼일이 있거든 적어 올리거나 그 간절함을 침전 방문 앞에 놓아두고 가라는 거였다나라에 급한 일이 생겨 이를 속히 직보 하기 위해 왕을 뵙기를 청하고자 하는 신료들도 늦은 시간이 되면 어떤 억측이 돌지 몰라 이를 멈추기를 꺼려하지 않았다무엇보다 구설과 광술이 두려웠던 것이다왕이 여자라서 그런다는 말

 

도 돌았고 실재로도 그랬다정사의 맥이 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도승지도 왕을 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궐 안팎으로 파다했다.

 

심지어 승지 신료들이 사안의 시급 중대함을 왕에게 아뢰고자 다투어 알현을 청해도 도승지가 나서 왕의 심기만을 챙겨 이를 앞서 말린다는 설이 설설댔다이렇듯 왕을 알현 하고자 하는 신료들과 백성의 소리가 신문고(申聞鼓)에 울리기를 그치지 않자 어느 날 왕은 편전에 나와 온 백성들께 친히 일갈(一喝)했다. “꼭 나를 보아야 하나요그렇게 내가 보고 싶으세요?”. 놀랍고 차원 높은 도술이었다왕은 도통(道通)에 가까이 있었다.

 

이즈음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암막술(暗幕術)의 시작과 끝이 되는 핵심들로 왕을 지근거리에 모시는 문고리들을 꼽았고 이들을 삼인방(三人幇)으로 지목해 불렀으며 바쁜 백성들은 그들을 고리삼환(三環), 또는 삼방(三幇)이라 줄여 부르기도 했다진상화상 그리고 봉만 등 궁궐 전속 호위무사 세 명이 그들이었다이들은 여왕이 부왕 사후 궁을 나와 성북신당달성을 전전하며 풍찬노숙 권토중래를 꾀할 때부터 지근에서 그를 호위해 온 자들이었다삼인방은 강호 무림에는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무사들로 그들의 무술과 내공 역시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고 강호의 무사들 역시 그들을 터럭만큼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권력은 무서운 법이들은 공주가 권좌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계종을 암막으로 둘러싸고 대소 신료들의 접근을 민첩하게 차단했다계종 역시 그런 그들을 어여삐 감쌌다서로가 서로를 감싸주었던 것이다격전에 격전을 치르고 천시만고 끝에 권좌에 오른 왕은 수많았던

대회전의 피로에 쌓여 친전에도 한 주에 두어 번 오후에나 산보하듯 들릴 뿐어전회의(御前會議역시 비 오는 날이나 되면 어쩌다 한 번 열거나 했다도승지(都承旨마저도 문고리가 문을 열어 주어야만 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왕은 다만어미를 닮았다는 뭇 백성들의 듣기 좋은 소리에는 친히 귀를 기울여 선대 모후를 닮으려는 트레머리 올리기 신공을 쌓기에 온 시간과 정성을 다했다더하여 흉망스럽게 세상을 떠난 부왕의 명예회복을 위해 왕조의 전력을 쏟아 부을 궁리에 몰두했다왕조의 처음과 끝이 부왕의 명예와 정통성을 찾아 세우기에 다 할 것이라고 누구나 예측했다왕의 이런 신공에 계종 즉위와 동시 도승지로 함께 궁에 들어온 예전 청주목사(淸州牧使태열이 안경을 벗고 탄식하자 계종은 두말없이 그를 갈아 치웠다태열은 일찍이 이조참판(吏曹參判)과 청주목사(淸州牧使)를 거친 부왕 희종이 총애하던 신진 관료였다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삼인방의 뒤에는 그들을 암암리에 조종하는 재사(才事유뇌가 있었는데 유뇌는 야인(野人시절 계종과 찬바람을 맞으며 그의 치마폭을 건사했던 가신(家臣)이었다삼방 세 명 모두를 유뇌가 직접 뽑아 처음부터 가르쳐와 그들의 무술이 곧 유뇌의 무술에 바탕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뇌는 그의 두 번째 처(무실(無實)을 끈으로 계종과 연결이 되었는데무실은 점사(占事만태(萬泰)의 다섯 번째 부인 임()씨의 세 번째 딸로 태어나 아비 만태의 총애를 받을 만큼 어려서 부터 아비를 가까이 따랐으며 만태는 그런 무실의 재능을 간파 일찍이 희종의 공주였던 계종의 옆에 무실을 바짝 붙여 공주와 함께 그네를 즐기게 했다만태는 모후를 잃고 실의

 

에 허무하던 공주에 접근 현란한 점술로 어린 공주를 현혹시켜 항간에 떠도는 말들이 기가 찰 정도라 급기야 부왕 희종의 국문(鞠問)까지 받았으나 현란한 사술로 이를 뚫어내 살아난 불세출의 점술가였으며 스스로는 상제(上帝)를 꾀했다만태는 후일 무실을 후계자로 삼아 공주가 도성에 돌아오기까지 호형호제를 삼도록 곁에 단단히 붙여 놓는다.

 

이렇게 조정(朝廷곳곳에 불이 하나씩 꺼지고 궐내가 점차 암흑천지로 들어가자 궁인과 나인 승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저 낮술이나 밤술을 가리지 않고 홀짝거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며 궁 안팎의 기강은 쇠하고 풍습이 문란해져 강호의 여러 곳에서는 희한한 일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

 

계종원년(元年계사(癸巳)년 초 봄아직 기온이 차오르기에 일러 을씨년스러움이 살얼음으로 땅바닥으로 깔릴 때계종은 아미리의 통령(統領오마마를 만나러 태평양을 건넜다십팔여 년의 와신상담의 격전을 거쳐 권좌를 탈환한 후인지라 열전의 여독도 풀고 향후 치세에 대한 궁리를 차분히 해보려 겸사겸사 아미리에 들렀는데바로 이때부터 계종의 치세가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초장부터 삑사리가 난 것이다남선의 왕들은 즉위 초면 의례히 바다 건너 아미리를 찾아 아미리의 통령과 수인사를 나누는 것이 관례였다아미리는 남선의 내전 때 남선의 편에 서서 군사를 보내 북선을 물리쳐 주기까지 한터라 남선과 아미리가는 서로를 혈맹(血盟)이라 부르며 친히 지내왔다.

 

사단의 처음은 계종이 데리고 간 시종 하나가 아미리에 들자마자 몸과 마음이 들떠 그만 밤새 독한 술을 먹고 옷을 벗어 던지고 젊은 처자를 쫒아 다니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며 탈춤 판을 벌이고 말았던 것이다무림에 공술을 내밀기 민망하고 처참한 그 치술(恥術)을 부린 시종의 이름은 언무림(言武林파평(波坪)출신 중창(重昶)으로 내전(內殿)의 대변(代辯)이었다.

 

당시중창은 왕명을 출납하는 춘추관의 두 번째 우두머리로 입신해 그 위세가 가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궁에 들기 전 중창은 계종이 양산(梁山)검객(劍客재은(在恩)과 치열한 본연결투를 벌일 때 종편(綜編)으로 끼어들어 손나팔로 재은을 찢고 까불어재낀 공로로 조정에 들어온 나팔수 출신이었다본연이 공주의 신승으로 판이 갈라지고 논공행상이 있어 어찌어찌 중창이 궁의 명부에 오르자 중창에 대한 공훈이 과하다는 말이 시중에 나돌았으나 그를 움직이는 끈을 만()왕자가 쥐고 있다는 것이어서 누구도 크게 나서지는 못했다만은 희종의 유일한 왕자였으며 계종의 유일한 남자 혈족이었으나 소싯적부터 일찍 아편에 들어 속세를 등진 마의태자(麻衣太子)어쨌거나 판을 그르친 왕은 그 자리에서 아침 일찍 중창을 깨워 쫒아 내버렸다.

 

그렇게 한바탕 요란을 떨고 중창이 궁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도 궁과 나라는 한시도 조용한 때가 없었다오히려 중창의 소란쯤이야 미구에 일어날 여러 가지 분란을 앞에서 알리는 삼현육각(三絃六角풍악 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이를 지켜보던 무림(武林)의 상수(上手)들은 이를 깊숙이 꿰뚫어 여왕에 간언(諫言)을 삼가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난국(亂局)의 제일 큰 사건은 아직도 뭍에 오르지 못해 원혼이 바다 속을 해매는 객선 삼월의 침몰 사건으로 멀지않은 갑오년 사월 열여섯 날에 일어난 사건이다여왕의 치마끈이 밟혀 왕조의 세월이 잡힌 것이다.

 

제물포(仁川)에서 탐라(濟州道)를 향해 무거운 세월(歲月)을 싣고 가던 철선이 목포 앞바다를 지나 진도(珍島팽목을 돌아 탐라로 항로를 잡으면서 그만 뒤집어져 버린 것이다배 안에는 원족(遠足)을 떠나던 단원의 어린 학동들 삼백을 포함해 사백 여 백성들이 타고 있었다.

 

배가 뒤집히자 온 나라가 함께 뒤집혀 쩔쩔 끓었는데 속절없이 늪으로 빠져드는 미물처럼 맹골에 잡아먹히는 철선의 모습이 시시각각 온 백성에 그대로 중계되어 마치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백성들은 배안에 갇힌 어린 학동들이 아직 살아 부모를 찾아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 그 안타까운 진저리에 정신을 잃었다모두가 궁울 바라보며 전능하신 여왕께서 그들을 모두 구해내리라고 믿었으며 그래주기를 바랐다.

 

궁의 비상상황을 관장하는 꼿꼿장수가 자전거를 타고 내전(內殿)으로 급히 내달아 이 전대미문의 급보를 전하고 여왕의 높은 하회를 기다리며 고개를 숙였다옥음(玉音)을 기다리는 충직한 신하의 자세를 다했다문고리 봉만이 이를 받았다.

 

꼿꼿장수가 누구인가일찍이 꼿장은 조선의 해빙을 위해 서경을 찾은 하중을 따라 북선의 우두머리를 만났을 때도 오로지 혼자 고개를 움직이지 않아 독야청청했던 무인이었다재야 무림에서는 육무림의 최고 단계까지 올랐던 그가 겨레의 역사적 사건에 고개를 뻗쳐 꼬장을 부린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야릇한 시각도 있어 서경에서 돌아온 꼿꼿장수를 꼬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이다그랬던 그가 고개를 떨어트려 부북(仆伏()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궁은 언제나처럼 정적에 휩싸여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훗날 밝혀진 바 그 시각 여왕은 트레머리를 올리고 있었다거나침상에 누워 상침(桑針)을 연마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아직도 명확하게 하나로 모아지지를 않는 미궁(迷宮)인 것이다선왕 서종에 이어 바다에서 두 번의 미궁이 바다에서 일어난 것이다서종의 미궁은 황해(黃海백령 앞바다에서 수군(水軍)의 철선이 두 조각이 나버려 수병(水兵수십 명이 가라앉아 버린 사건인데 그 수병들이 가라앉은 때도 바로 초봄 사월 이었다.

 

온 나라가 온 백성이 며칠째 종일 동동거리며 쩔쩔 끓었으나 여왕과 궁은 꿈적도 안했으며 궐은 깊은 침묵에 들었다높은 내공에서 나오는 대단한 도술 이었다온 나라의 온 백성이 가슴을 치며 궁으로부터 내려질 생명수 같은 옥음을 기다리며 온 나라가 가뭄에 목이 탔다삼월은 이미 맹골 속으로 깊이 들어가 모습을 나타내기를 버텼다.

 

그렇게 촌각이 화살처럼 날고 어둠이 짙어지자 여왕이 드디어 나타나 옥음(玉音)을 던졌다.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올라오기가 그렇게 힘드나요?”였다지존다운 고도의 옥음이었다.

 

 

하지만 이를 어쩔 것인가백성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학동들이 살아 날 가망은 더욱 만무해지자 나라가 통째 뒤집혀 오르기 시작했다백성들은 이런 니밀헐 나라가 어딨냐며 거품을 물고 단원을 비롯한 경기일원은 물론 도성까지 물 끓듯 뜨거운 열을 뿜어냈다있는 자나 없는 자나 자식을 가진 모든 필부필부가 열 마디 백 마디를 쏟아냈다여왕이 후사가 없는 것이 기름이 되어 불에 끼얹어졌다온 나라에 번진 불길이 아지랑이처럼 이글거려 올랐다나라가 덜컹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백성들은 철선 밑으로 굵은 쇳덩이들이 가득 실어있음을 탓하기도 하고여러 물화들을 꼭꼭 단속해 묶어놓지 않았음을 탓하기도 했으며선주(船主)가 누구인가를 찾아내야 한다고 짖어대기도 했으나 여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일기 불순한 날을 택해 친히 팽목에 한 번 내려갔다 오는 것으로 나랏님으로서 할 일을 갈음해 매조지 하려했다.

 

이때느닷없이 경기 안성고을에서 도승지 거춘을 향한 대자보가 나붙었다이때 거춘은 본직 도승지가 아닌 대원군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는데대자보를 내건 그들은 백모(白毛병언(病言)을 두목으로 하는 구원파 일당이라며 배후를 당당히 드러냈다백성들은 아닌 밤 중 홍두깨며 아니 땐 굴뚝에 불이라며 우왕좌왕 어리둥절할 뿐이었다다만깊은 곡절이 서린 내막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구원들은 거춘이 소싯적 관계했던 기밀원을 내세우며 다 까버릴 것이라고 궁을 겁박했다백성들은 또 저것들이 과연 저것들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기실계종이 즉위하기까지는 기실 기밀원의 세작들이 음으로 양으로 강호의 곳곳에서 주야로 호시탐탐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저자 뒷골목이나 술청의 곁다리에 끼어 딴죽이나 댓죽을 걸어 공주를 왕으로 추켜세우기에 매진한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곧 댓글부대다이들은 국가기밀원인 헌릉원(獻陵院)의 소속들로 본연 대회전이 벌어지는 동안 강호의 곳곳에서 계종이 최고라고 나발을 불던 자들 이었는데그 중의 한 부대가 선정릉(宣靖陵근처에 어린 처자들을 모아놓고 상대 무림의 대표 상고수 재인을 짓이겨 까불어댔다병부(兵部)의 병졸들도 함께 어둠속을 기었다.

 

왕조가 서서히 그리고 은밀한 큰물에 가랑비 젖듯이 어둠에 들어갔다그사이에도 밤잠을 마다하고 오로지 저들기리 서로 챙기고 챙겨주기에 바쁜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박()무리들인데 이들은 훗날 진(), (), (), (등 여러 분파로 이합집산을 하는데 어떻든 이들 모두가 좀도적의 무리를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이화梨花

 

계종鷄宗 4년 병신丙申년 가을도성 서쪽 신촌(新村)골에 때 아닌 배꽃(梨花)이 피어 살짝 여왕의 심기를 건드리긴 했으나 여왕은 궐내에 소년검자 우()동자를 가까이 두어 꼼짝도 안했다배꽃 소녀들은 무실의 딸이 학당에 몰래 들어와 말을 타고 다니며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니는데도 학당의 모든 훈장들이 이에 꼼짝을 못하고 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울며불며 외쳐댔다.

 

소녀들의 곡성을 유심하게 들어 익히 그 속뜻을 알아차린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나서 우선 궁의 어린 우()라도 내칠 것을 읍했으나 왕은 오래토록 귀를 막았다그대가지도 백성들은 어린 우를 눈여겨 볼뿐이었으며 무실도 우의 수하로만 여겼었다여왕의 관심은 오로지 태양의 후예에 모아져 있었고 소란이야 아랫것들의 칭얼댐에 지나지 않았다왕의 높은 신공이었다그래도 백성들이 내내 멈추지 않고 앙알대며 봉알대자 왕은 부왕(父王)이 긴 통치기간 내내 쏠쏠한 재미를 봤던 개헌(改憲)을 생각해냈다.

 

시월 스무 나흗날이 되자 계종은 단풍놀이 가듯 오랜만에 여의회당으로 나가 홀연 나랏법을 바꿔 볼까 한다고 옥음을 선포했다그러니 너희들 여의(汝矣)의 여러 지저귀는 새소리들을 한 번 모아보라는 것이다그 지저귐을 들은 다음 왕의 마음대로 뭐든 해주겠다는 것이었다백성들의 소란이 들끓어 시들지를 않자 우매한 백성들의 시름을 달래주는 척 어린 백성들을 홀린 것이다.

 

그날 밤왕이 흐뭇하게 침소에 든 시각에 제미씨라는 그림통 회사가 사이비 교주(敎主만태의 딸인 무실(無實)의 수렴청정(垂簾聽政국정농단을 터트려 버린다화염이 궁궐을 덮쳐 온 나라에 불길이 번졌다.

 

스무 닷샛날이 되어 불길은 더욱 더 번져나가 온 나라가 쩔쩔 끓어대자 오후에 왕은 홀연 침소를 나서 화단에 물을 주듯 활활 타는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너무 꼼꼼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그러면서 내가 이런 꼴 보자고 옥좌에 오른 것인가?” 라며 깊은 자괴를 나타내며 백성들께는 사과나 하나씩 먹을 것을 명()했다아직도 권위가 짱짱했다안면몰수술(顔面沒收術)을 쏘아버린 것이다.

 

왕의 안면몰수 자괴신공(自愧神功)이 펼쳐진 다음 날스무 이렛날여명을 기해 무실의 신령(神靈)이 덕국(德國)에서 나타났다같은 계통의 선계(仙界)인 통일 선명교주의 나발통인 세계보(世界報)를 통해 옥음(玉音)을 전한 무실은 지금 자신이 화병(火病)이 나 당장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백성들을 보란 듯이 겁박했다깊은 첫 간()을 본 것이다그윽한 간술(揀術)이자 무실의 첫 무공(武功)이었다이때부터 무실은 구라파 여러 나라를 넘나드는 축지술(縮地術)을 시연해 보였으나 그 보폭이 얕아 곧바로 실체가 포착되는 실연을 거듭했다.

 

무실은 쉴 새 없이 손쉬운 연막공(煙幕攻)을 펼치며 도생을 꾀했다그러면서 뒤로는 은밀하게 자신의 사병(私兵)을 관리하는 영태(靈胎)에게 클났다라고 방언을 화살로 날렸다영태는 무실이 해운(海雲)의 음주가무 시절 특별하게 만난 이후 특별한 총애를 아끼지 않던 미랑(美郞중의 하나였다.

 

백성들 눈에 처음으로 가까이 나타난 무실은 이미 검은 머리에 검은 안경에 눈 밑에 검정을 칠했으며 옷도 검어 저승사자에 버금 했으므로 어린 백성들은 또 무릎을 쳤다두 여인의 치밀함을 알아차려 버린 것이다백성들은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이 와중에 망우리 넘어 강촌 지나 봄내 공지천변에서 태어나 망언(妄言신공(身攻)하나로 화무림에 뛰어든 소년 수련생 도꼬다이 막태가 왕과 무실은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단도(短刀)를 뽑아들고 불길 앞에서 길길이 외쳐대 보았으나 아무도 그 어린 동자를 알아보지는 못했다너무 어렸던 것이다다만어린 동자의 시세를 놓치지 않는 눈매와 도약술의 재빠른 챙김만은 가상히 여겼다막태는 우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왕의 지방행차에 도성 변두리 향교의 학동들이 뛰어들었으나 곧 바로 체포돼 포도청으로 끌려갔으며 명륜동에서는 성균관의 학사들이서강(西江)에서는 야소교 학동들이 왕을 끄집어내려야 한다고 외쳤다동서양(東西洋)을 출렁거리는 소리가 양양(兩洋)에 거센 파도를 쳤으나 왕은 없었다안면몰수술의 하술(下術)인 철판공(鐵板功)을 깔아버린 것이다.

 

대저강호무림에서 이 공술은 철공과 판공으로 나누어 초식을 펼치는데 왕은 이를 합하여 한꺼번에 일합(一合)으로 뭉개버린 것이다도술의 놀라운 일취월장(日就月將이었다왕의 일합 신공이 펼쳐지자 대궐의 도승지부터 먼 산골 동헌의 아전들까지 나라의 녹을 먹는 자들은 모두 일시에 붕어가 되어버린 것이다담합공(談合攻)이 펼쳐진 것이다모두가 아파하는데 그들만 아프지 않은 것이다백성들은 더 무거워졌으며 그럴수록 밤길을 택해 바삐 오가며 무엇인가를 쌓아 나갔다.

 

왕의 진()에 담합공이 깔린 날 사헌부의 포졸들이 무실의 처소에 들이닥쳐 푸라다를 비롯한 그녀의 신발 오십여 족을 찾아오는 신통한 업적을 올렸다며 한가한 체면으로 낮을 차렸다이렇듯 도성의 저자거리가 한가하듯 긴박하게 돌아가는 마당에 아리수 건너 송파 지근 산성(南漢山城)의 기슭 야탑(野塔)에서는 긴급한 도모가 시급을 재촉하고 있었다도성의 야화(野火)를 새 왕조의 물고로 이끌어 버리자는 것이었다혁명의 맹아(萌芽), 모반(謀反)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이를 주도하고 나선 이는 견민상수(見民上手)로 남녘 득량(得量대실말 윗골 출신 향리(鄕吏)였다시국을 잘못만나 일찍이 속세를 등지기로 작정하고 홀로 무공(武功)을 다지기에 홀연하던 그가 하산(下山)한 것이다소싯적 그는 우람한 목소리 하나 만으로도 병과(兵科초시(初試)에 올라 학병 무리를 이끈 적이 있어 장래가 촉망 되었으나 당시 조정과는 뜻과 모든 것이 맞지 않아 스스로 전도(前途)를 접어버린 특이한 자였다사람들은 그를 제갈견민(諸葛견민또는 공명상수(孔明상수)라 부르기도 했다.

 

그의 구상은 이렇게 된 마당에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때를 놓치면 몇 십 년이 걸릴 것이므로 선지자 하나를 내세워 저들을 공략을 해야 한다고 설파했다그리고 자신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울 것이라고 했다다만 아직 칼을 뽑지는 않겠노라고 했다도성의 불에 자신의 연기를 섞어 화공(火攻)을 펼칠 심산이었던 것이다사람들이 그를 믿었다귀신이 돌아온 것이므로,,,

  

그런 은밀함이 긴박하게 조여들던 어느 날 그가 어떤 검자(劍者한 명과 회합에 들렀는데 검자의 손에는 이무기 한 마리가 들려있었다검자는 그 꼬리를 틀어잡고 있어 그 머리가 몹시 흔들렸다그 이무기 검자는 훗날 무림에 들어 재명검사(才名劍士)가 된다.

 

한편수원부(水原府인계(仁溪)에서는 화평(和平)시째골무(骨舞)우식(禹植), 같은 재야무림(在野武林)의 은자(隱者고수(高手)들이 연일 소리도 없이 회동순식간에 남아리수 지근 양평(楊平)을 다녀오기를 반복 했는데 그 왕복 시간이 삼십 분(三十分)에도 못 미쳐 그 긴박함에 강호의 무사들이 엎드려 이를 주시했다축지법(縮地法)을 익혀 그 도술(道術)에도 능수능란(能手能爛)한 우식과 시째의 신공(神功)을 익히 아는 터여서 였다같은 날 야심한 밤이 되자 시째가 돌연 칼을 잠그고 수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분개한 시째가 그날 양평지간에 치아를 모두 갈아버린 탓이었으나 일각에서는 분(냄새 없는 곳을 꺼려하는 화평검자의 내공을 지키려는 칭병(稱病)이라고도 했다하지만 역사는 이를 화평의 회군’ 이라고 기록했다말을 돌려 구미곡(九美谷)에 든 재갈견민은 "곧 새날을 가져오리라"며 경전(經典편찬에 들었다만태와 무실을 적공(積功)한 뒷날을 대비하는 것이다.

 

마침내병신년(丙申시월 계종 즉위 4붙잡혀 돌아온 무실의 국정농단이 세상에 하나 둘 속속들이 까발려지고 동짓달 초사흗날 무실이 하옥(下獄)됐다무실의 농단은 강호 무림의 추측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세계로 칼끝을 겨누었던 것이다그녀는 왕의 후일 도모를 위해 미연에 구라파 여러 나라에 보화를 축적 은신해 두었던 것이다뿐만 아니라 조정의 곳곳에 수하 술사들을 박아 앉아서도 국정을 손볼 수 있도록 치밀했던 것이다백성들이 짐작했던 농단술은 그녀에게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이었던 것이다역시 만태의 딸이었다.

 

무실이 하옥되자 왕은 침전에 박혀 흉중을 가린 채 환관 문고리 셋과 도승지 종()을 비롯해 호위법사 우경사(經事범 등 내시들을 출궁(出宮)시켰다어쩔 수 없었다기어이 출궁돼 내팽겨 쳐진 우는 소년검자였다일부 무림의 노수(老手)들은 그가 안쓰럽기도 하다고 했다어린 것이 세상 물정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았었겠는가그저 귀엽다귀엽다잘한다잘한다.” 하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들었던 것이 아니겠냐는 너그러운 마음씨였다하지만 아무리 어려도 그는 이미 법사보다 높이 오른 율사(律士)였다그가 빠지자 나라의 권력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으며 궁과 조정이 쥐죽은 듯 조용해 썰렁해졌다그가 없어 스치는 미풍에도 궁은 무너져 내릴 판이었다그만큼 그는 당대 내로라하는 권세가였던 것이다궁과 조정의 요직에 그가 보낸 세작들이 가득했다.

 

이 와중얼떨결에 가춘에 이어 도승지가 돼 궁에 들었던 전(한성판윤(漢城判尹()은 또 얼떨결에 궁을 떠나 늘그막 얼굴에 큰 긁힘을 얼떨결에 남겨 멋모르는 망신살에 들며 훗날 얼떨리우스로 불리우게 된다.

 

후임 도승지로는 야무림(野武林출신 옥()이 들어오는데 그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 완산(完山)에서 소식을 키워왔던 선왕 하중의 충직한 공자였지만 계종이 궐위에 오르기 전 본연판에 가까운 수하 여럿을 데리고 투항 나름대로 계종 즉위에 공을 세운 터였다하지만 이 입궐로 그는 더 많은 욕을 들으며 노년과 일생을 스스로 망가뜨린다세상의 입 있는 사람들이 모

 

두 나서 옥을 천하의 드런 놈이라고 불렀는데 옥으로 인해 종이 그나마 덜 망신을 받은 것이다.

 

그렇더라도 속속 드러나는 왕과 무실의 행적에 무림은 횡횡 어지러움과 놀라움이 그칠 줄을 몰랐다농단의 봇물이 점차 끝없이 터져 나가고 있었다더하여 왕의 매화틀까지 튀어나와 시중에 흔들거렸는데 왕이 어디를 가든 금빛 매화틀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재물포 부사 길송이 이를 처음 불어대자 원주부 말 목장 사육장도 뒤따르며 여기저기서 매화틀 나발을 불었다

 

/횃불

 

이렇게 한 겹 한 겹 여왕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궐내의 움직임은 겉으로 조용해져 갔다여왕 자신이 이를 크게 개의치를 않았던 것이다궐은 겉으로는 우아했고 속으로도 편했다옥이 이를 분주히 다스렸다상황이 걱정되는 대신 몇 몇이 이를 여왕께 읊조리고자 했으나 도승지옥을 비롯한 측실들이 이를 말렸으며 그들 또한 왕과 같이 믿는 것이 있어 설마하며 낙관했다백성들의 고함을 없는 것들이 추운 날 모여 집단 불체조로 울화를 푸는 것으로조금 고깝게 생각하는 정도였다.

 

동짓달 초에 이르자 강호(江湖)의 한다하는 검객(劍客)들이 하나 둘 계천(溪川)옆 광장으로 몰려 나와 나름의 무공(武功)들을 시연(試演)해 보이고여기에 맞서 왕의 수호부대 어벙이들은 제미씨 앞에서 왕의 개김을 옹호했다아미리에 선()을 대고 자손만대 잘난 척고상한 척착한 척을 하는 개독의 무리들이 그들의 뒷배를 댔다백성들은 만고강상 참담함에 치를 떨었고 때 아닌 한파가 대관령 일대를 훑어 궁으로 치달았다서릿발의 발톱이 날카로웠다.

 

상황이 이렇게 가파르게 치닫는데도 삽신술사(揷身術士시우(是愚)는 여전히 은신 중으로 가끔 어둠을 도와 도성에 들어 화문(化門)에 나가 세대왕(世大王)을 친견(親見)하고 대왕과 몇 마디 귀엣말을 나누고 돌아갈 뿐이었다항간에는 그가 연일 인계(仁溪)골에서 큰 술만 삼킨다는 말이 나돌았다하지만 그는 이미 여러 번 야심을 도와 축지법으로 산성과 수리를 뛰어 오가며 공명상수화평시째와 은밀하게 접촉하며 훗날을 다지는 깊은 도술(飮酒)를 다졌다그런 날마다 술사는 깊은 통음 후 인천의 성냥공장’ 이라는 알 듯 모를 듯 소리를 읊조렸으며 화평시째는 빨간구두를 암호로 남겼다공명상수는 순식간에 성냥공장과 빨간구두를 적어 두는 신공을 펼쳤다각공술(刻功術). 공명의 각공술을 넘어뜨린 공술은 이때까지 강호 무림에서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공술의 깊이가 깊은 도술이어서 누구도 이를 흉내 낼 수 없었다.

 

한편여의회에서는 계종을 왕으로 밀어 올렸던 화무림의 붕당(朋黨새눌에서도 슬슬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검무(劍舞)가 펼쳐지기 시작했는데영도진(影島津출신 무대(武大)와 그에 선을 대고 있던 여러 검자들이다그들은 먼저 궁에서 내려온 상선 내시 이현을 조준해 무림을 떠나라며 씨팍공을 펼쳐 채근했다씨팍공은 십팔계공(十八系功)의 하나로 근원인 삼십육계(三十六計)에서 진화된 공술이었다여왕의 간을 깊숙하게 보는 지간공(肢揀攻)을 쑤셔버린 것이다.

 

앞서 왕의 간을 본 승유(承流)가 대충 무사하게 시절을 간수해 넘기자 이에 용감을 무쌍하게 더해보는 것이었다본시 그런 자들이었고 이는 화무림의 오랜 전통이어서 저자의 모든 백성들도 그러려니 하며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이에 맞선 상선내시 이현은 뭣도 모르는지라 순진하게 왕의 밀지(密旨)를 받아 쥔 것만을 단단히 믿어 조까술을 부렸다조까술은 왜에서 넘어온 사술로 판을 흔들어 본말을 흩뜨려 버리기 위한 깽판술의 전 초식(前 稍食)으로 막판술(莫板術)이나 전복술(顚覆術)의 초술(初術)로 패전을 자인하기에 무례한 저급한 사술이어서 강호의 무림에서는 이를 펼치기를 삼가는

막술(邈術이었다백성들은 이를 보며 씨부랄을 깔 놈들이라며 혀를 끌어 찼다그러거나 말거나 철없는 왕의 소년 무사들은 아직도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눈알을 부라리며 몹시 원통하고 절통해 하며 곳곳에 소금을 뿌려댔다밥줄이 곧 끊어질 것임에 전전긍긍하는 것이긴 했다흠 같은 소년무사들과 어벙문파와 음마부대들이 나서 여기저기 찍찍 침을 뱉어가며 칼춤을 시늉했다열심이었다대를 이은 저들만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충성이었다.

 

옥에 든 무실은 곧바로 독공(獨功)에 들어 밥도 잘 먹고 옥졸들에게는 파스와 과자를 청하는 도술을 부려 입방아에 올랐으며 왕내시 경사였던 범은 역시 모린다술을 부리며 모든 공을 왕에게 돌리는 모범을 보였다모린다술 역시 바다를 건너온 신술(新術)이기는 해도 입을 목안으로 담가 버리는 함술(緘術)에 비하면 한참 아래 무사들이나 펼치는 초식이다범은 궁에 들기 전 성균관의 학사였는데 그 부지런함이 궁에 들어서도 변함이 없어 쉬는 시간에도 여염의 상납 챙기기에 최선을 다하는 열성으로 왕의 눈에 가까이 들어 오직 그만이 왕이 쏘아대는 광선의 사각아래 있어 온존했다.

 

왕이 도승지와 영의정을 갈아치운 동짓달 초사흗날 술시(戌時)가 되자 은인자중 신출귀몰로 암행하던 시우술사(是愚術士)가 인왕을 훑어 내린 싸락눈구름을 타고 드디어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장탄을 토했다 "ㅆㅂㄴ이다". 무림의 검자들은 술사의 이 일갈(一喝)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는데한 무리는 술사가 도성으로 직접 올라가 궁궐을 겨눌 것이라 보았으며다른 한 무리는 우국충정에 끓어오르는 신음에 다름 아니며 결코 함부로 신공을 부리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어떻거나 그가 스스로 움직일 것을 결심 한 것이다와중에도 술사(術士)는 여취(女取)에 골몰 새로운 도술 개발을 도외시 하지 않았는데 이는 술사의 균형 깊은 내공(內空)이었다.

 

술사와 재사(才士공명상수(孔明上手)는 공중부양(空中浮揚상태에서 주작(酒酌)을 나누던 무림의 상고수(上高手)들 이었다일찍이 소년 술사 시우(是愚)는 신공(神功삽신술(揷身術)을 완성 무림에 혁신풍(革新風)을 불어 넣어 강호를 일신(日新무림의 전설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어쨌거나동짓달 초순나라가 여왕이 연일 부어대는 기름으로 쩔쩔 끓어 불길이 잦아들지를 앉자 왕은 또 다시 여의섬으로 나가 개김술을 펼치며 공을 던져 버리고 왔다선왕 서종(鼠宗)처럼 배째라’ 술수와 모린다’ 도술을 함께 펼쳐버린 것이다.

 

 

이렇게 왕이 두 번이나 퉁을 쳐 보았으나 이미 야전(野戰)에서 풍찬노숙 닳고 닳은 야()무림은 패를 돌리지 않고 마이를 까라고 했다앵꼬가 다 된 상대의 밑천을 눈치 챘는데 패를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으며이는 또 강호에 널리 오래된 무림의 내림 이었다.

 

왕은 당황해 기왕에 뜯어 놓은 삥들을 기억해 보았으나 삥바리들이 이미 하옥돼 있는 터라 우선 먼저 패부터 돌려 판을 살려보자며 눈물까지 비치는 사술(邪術)까지 부려 보았으나 이 또한 허사였으며 어벙이들만 굳세어라 금순아를 마른 눈물로 엎드려 훌쩍거렸으나 어느 방울 하나 흘러 바닥을 적시지 못했다.

 

홀로 궁에 유리된 왕은 밤마다 그 쪽팔림에 분개 주공술(主攻術)인 광술(光術)로 레이저를 쏘아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전날 모반에 성공한 태평양 건너 아미리의 트럼프만 왼쪽 입술을 올리며 딸딸거리고 있었다계종 사년 동짓달 초순이 지나고 있었다초열흘 이었다.

 

/무녀(巫女)

 

무실을 벗겨보니 그녀는 무녀(巫女)이자 왕사(王師)로 밝혀졌다무사(巫師). 왕사(王巳). 그는 왕의 스승이었던 것이었으며 커다란 구렁이였던 것이다검은 이무기가 왕사가 되어 진즉에 여왕을 칭칭 휘어 감고 똬리를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여왕의 문고리 내시(內侍화상의 전화통에 고스란히 담겨있던 소리를 되살려 틀어보니 거기에는 여왕이 무실에게 선생님이라고 간곡히 읊조리며 궁과 조정의 대소사를 나누었던 것이었다여왕이 무녀의 꼭두각시였음이 사실로 들어난 것이다저자를 횡행하던 모든 구설들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사헌부의 간찰들마저도 모처럼 궁궐을 향해 크게 침을 뱉어 버렸던 것이다이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기가 차다는 것이었다모든 백성들이 이 두 여인을 쌍녀(雙女)라 일치에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놀라 자빠져 한동안 일어날 줄을 몰랐고 더러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자도 있었지만 놀라지 않은 술사(術士몇이 있었는데 거춘과 소년검자 우가 그들이었다.

 

쌍녀의 귀기서린 변신술이 소설(小雪)을 잡아당긴 계종4년 병신년 동짓달 스무하룻날전일 열 아흔 날 밤에도 열렸던 백성횃불걷기가 달포 내내 계속되며 온 나라 온 백성들이 이제여왕께서는 복잡한 정사에서 벗어나 제발 그저 편히 쉬실 것을 엎드려 재촉했다그러거나 말거나 여왕은 끝까지 개길 것을 승정원에 밀지로 내렸고 대변승지 연국이 이를 백성들에게 나와 전했다백성들은 민심의 충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귀머거리 여왕에게 ㅁㅊㄴ이라며 내놓고 그를 크게 비웃었으며 특검(特檢)을 빗질하던 여염의 평범한 여인까지 나서 염병하네라고 짓이겨 버렸다병신년이 더디 가고 있었다.

 

한편수리산으로 들어갔던 화평시째의 하산 소식이 경인간 일대에 퍼지고 그가 칼집에 오른손을 댔다는 것이 알려지자 강호 무림의 검객들이 오직 한 곳으로 시째의 오른손을 주시했다.

  

/탄핵(彈劾)

 

이렇듯 무녀의 농단사술이 하나 둘 벗겨져 세상에 드러나는데도 여왕과 무녀는 희희낙락 백성들을 조롱하며 모르쇠로 일관하자 드디어 여의회의 검객들이 들고 일어나 왕을 탄핵 해버렸다왕의 옷을 벗겨버린 것이다새눌의 검자들도 여럿이 담을 넘어 이를 도모했다여왕의 장래가 헌재(憲裁)로 넘어간 것이다헌재는 성균관 가기 전 재동골에 있었다.

 

그래도 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술을 외며 조까술을 부렸다아직도 뭐가 뭔 줄을 모르고 있었으며 여왕뿐만 아니라 도승지를 비롯한 승정원 등 궁의 가신들이 모두 그랬다단 하나의 충신(忠信충언(忠言)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궁은 황폐하고 피폐해져 있었다.

 

이런 시간들이 속수무책으로 흘러 여의회(汝矣會)의 탄핵이 헌재(憲栽)에서 판결난 날은 계종 오년 정유(丁酉)년 이월 열 사흗날 양력 삼월 십삼일 이었는데헌재는 이날 여왕을 파면(罷免해버렸다그러면서 한마디로 나쁘고 한심한 년’ 이라고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헌재 문 앞에서 어벙이와 음마들이 차라리 제 목을 쳐달라고 난리를 쳐댔으나 실제로 목을 내놓는 위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그런 것은 그러거나 말거나 였다그날 법대(法臺)의 높은 곳에 앉아 이를 판관(判官전원일치(全員一致)로 선고(宣告)한 판관은 여인판관 정정(訂正)이였는데그날 아침 정정은 앞머리에 핑크빛 롤 장미를 돌돌 말고 나타나 여왕과 일당들을 돌돌 말아버릴 것을 암시했다견민상수가 바빠졌다.

 

여왕이 파면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궁에서 꼼짝을 않고 개김술을 펼치자 무림의 움직임이 다시 광화문에 어른거리자 왕은 바로 다음날 저녁 야음(夜陰)을 틈타 아리수 넘어 봉은사(奉恩寺앞 삼별로 들었다몇 일후 모든 언론은 이곳을 삼별택이라 통일해 불렀다왕의 검은 가마가 삼별 앞에 이르자 골통(骨通)들과 취한 어벙이와 음마들이 마마를 허공에 외쳐대며 울고불고 지랄술을 펼치며 나리나리 개나리를 크게 외쳐댔으나 이 또한 눈물도 흐르지 않는 빈 공술(空術)이어서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했으며 이들 일당들을 골빈당(骨貧黨또는 잔당(殘黨)의 무리라 가엾게 여겨 불러치웠다.

 

계종이 탄핵 파면되어 사저로 쫓겨 나온 지 한 달 여 흐른 정유(丁酉)년 춘 삼월 초나흗날 축시(丑時)가 막 지난 인시(寅時초 삼분양력 사월 삼십 일일 새벽 세시 삼분대개 역사적 사건들의 시간들이 이렇게 절묘하듯 드디어 계종이 구속(拘束),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나라가 소란스럽고 그녀로 인해 날로 시끄럽고 백성의 일상이 귀찮아지고 짜증이 더하니 그를 강 건너 조용하고 고적한 곳으로 보내 쉬게 하라는 구속영장(拘束令狀)이 떨어진 것이다사헌부(司憲府)의 판관 부영이 이를 발부했는데 부영은 탐라(耽羅출신의 판관 이었다.

 

아비 희종이 수병(海兵)을 앞세워 권좌를 탈취하려 아리수 다리를 넘어오던 그 여명의 시간에 그의 딸 계종은 권좌를 잃고 다리를 거꾸로 건너 내려간 것이다.

  

강을 건너 태령(泰嶺)을 넘어 가천(加川)을 지난 계종의 가마가 이른 곳은 이왕골에 있는 포일대옥(大獄이었다여왕이 하옥(下獄된 것이다그녀가 새벽에 들이닥쳤지만 옥리(獄吏)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그녀가 올 줄 알았기에 진즉 대비를 소홀하지 않았던 터였다다만 골당의 노비들만이 빈 곡소리의 목청을 높여 충성을 과시했고 여왕의 친위 사모대가 삭발을 하며 눈물을 찍어내기 바빴지만 론통(論通)의 서기(書記)들과 그림통들은 바삐 써대고 찍어대기 무심히 바빴다.

 

하지만 통탄할 것은 이 어두운 새벽에 이르기까지 궐내의 어느 승지(承旨내시(內侍하나 목을 꺾는 놈이 없었고 올라가 도승지나 판서 참판 같은 당상(堂上)의 높은 자리에서 여왕에 빨대를 꽂기에 굳건했던 어느 놈 하나 할복(割腹)으로 항거 자진하는 놈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는 것이다아니 시늉하는 놈도 하나 없었다백성들은 이를 더 이상하게 여기며 혀를 끌끌찼다여왕의 패거리들은 그 중에서도 영의정(領議政고환(睾丸)을 특히 더욱 씹어댔는데여왕의 은총으로 형조판서를 거쳐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오른 그야말로 분연히 또는 교활하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랐으나 그러지를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저자의 백성들이야 고환의 흉중을 어찌 알 수가 있었겠는가고환은 이때 새로 금시계를 만들며 새로운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고환인들 일인상(一人上)의 맛을 모르겠는가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아는 법.

 

다만 백성들만 표정이 굳어져 갔으며 중심을 잡기에 안간힘을 썼다나라가 걱정된 것이다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백성들이 먹고 살기에 바빠 안심하고 나라를 맡겨 놓기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다만 가까운 훗날의 사가(史家)들은 그녀가 그래도 혼신으로 애를 써 심정을 다 한 몇 가지가 있어 그 중 두어 개를 꼽아 적어 두었는데 그 하나가 그녀의 깊은 효심이다여왕은 즉위에 올라 와궁(瓦宮)에 들자마자 와신상담 흉중에 갈아 담아 두었던 부왕의 복권을 위한 계책을 실행하기에 공력을 다해 은밀하게 호시탐탐 했다.

 

여왕이 준비해 궁으로 가지고 들어온 계책 중 하나는 사초(史草)를 뜯어 고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그녀는 먼저 국교서 개편을 마음에 굳게 다잡고 백성들의 시야를 최면(催眠)한 후 부왕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예부(禮部)에 별과(別科)를 설치하고 궁에서 멀리 둥지를 만들어 밤으로만밤으로만 터를 잡아나갔던 것이다아비를 향한 일편단심의 효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여왕의 치맛자락이 밟히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이를 몰라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아직까지도 왜라면 이()를 부드득 갈아대는 백성들의 원혼이 남아도는 터에 왜를 감싸 안아 적당하게 눈감아 주려했으니 과연 그 일이 가당키나 할 일인가아비의 얼굴에 묻은 검불을 털어내려 만백성의 얼굴을 짓밟아 보려 했던 것이었다.

 

이 외에도 사가들이 적어놓은 사초에는 레이져 뽕황금 매화틀육중한 트레머리사방 유리거울사법의 등을 쳐 왜 살리기 등 여러 가지가 많고 많이 있었으나 그것들을 여기에 다 올리기에는 너무 그래서그래도 가오있는 백성들은 차마 이를 옮기지를 저어하는 것이다.

 

이상스럽게 왜()와 연결이 되는 정유년이월에 여왕의 시대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애련이 오공삼녀(503)가 된 것이다처연한 나라의 안쓰러운 한 시대가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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