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은 내 몸의 일부
붓의 네가지 덕(德)
남들과 똑같이 시속 160km를 달릴 수 있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한 번도 제 속도를 내보지 못했다. “속도를 늦추면 풍경이 보인다.”는 말은 핑계였다. 아내는 뒤에서 답답하다며 헬멧을 툭툭 쳐대지만, 워낙 겁이 많을뿐더러 몇 번 사고가 크게 나서 속도에 대한 스트레스성 정신장애(trauma)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오토바이는 타느냐? 그게 참! 아내가 반강제로 부추겨서 2종소형면허를 취득했고 3천만 원이 넘는 오토바이를 아내가 사줬기 때문인데, 그전에 짜장면 배달 오토바이(88)를 타고 전국 여행을 몇 번 다녀본 경험도 있고 오토바이에 아내를 태우고 12톤 카고트럭 밑구멍으로 들어가 본 적도 있었으니,
한번은 아내와 함께 한계령으로 단풍 구경을 떠났는데 한계령 정상에서 속초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풍경에 취해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오토바이를 왼쪽으로 눕히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눕히면 오른쪽으로 갈 뿐이었다. 어느 순간 커브 길이 나타나면 아내도 굽어진 방향으로 몸을 눕혀 오토바이가 힘 안 들이고 누울 수 있도록 몸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토바이와 나 그리고 아내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무려 다섯 시간을 달려왔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도 아내도 내 몸의 일부였던 것이다. 연못의 물고기가 서시의 미모에 반해 헤엄치는 걸 잊고 물속에 빠져 죽었다는 무아의 경지 그 자체였다.
문득, 서예가가 붓을 잡았을 때 붓이 서예가 자신의 손 일부가 아닐까? 붓에 먹을 묻힐 때는 뭘 쓰겠다는 의지가 작동했겠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잊는 무아의 경지에 들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글자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이 되겠느냐? 먹을 묻힌 붓이 한지 위에서 위로 살짝 밀려 올라갔다가 힘차게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런 무아의 지경을 (…)오토바이와 나 그리고 아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좌로 눕고 우로 누워가며 한계령 구불텅길을 벗어나듯이 붓과 한지와 붓을 잡은 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획 한 획 밀고 당기다 보면 어느새 완성되어 있는 하나의 작품,
“글씨라는 게 그런 게 아닐까?”
물고기가 물속에서 “아 숨 쉬어야지”하며 숨 쉬지는 않을 것이다. 일필휘지라는 말이 있다. 한 획을 긋더라도 무아의 지경 속으로 들어가 긋는 획을 일필휘지라 하지 않겠나? 붓에 관한 摩河 宣柱善 마하 선주선 선생 中鋒難 중봉난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中鋒難 중봉난
一粒柔豪無說想 일립유호무설상 尖齊圓健解中鋒 첨제원건해중봉 賢才書士終無得 현재서사종무득 千載難逢難幸逢 천재난봉난행봉
한 터럭의 연약한 붓털이야 그 무얼 하랴만, 첨 제 원 건을 통달하면 중봉을 안다네. 숱한 선현들도 끝내 깨닫지 못한 걸 보면, 천고에 만나기 어렵고 요행히 알기도 어렵다네.
尖첨 齊제 圓원 健건, 마하 선주선 선생은 붓의 네 가지 덕을 시로 노래했고 가산 김부식 선생은 그 붓의 덕으로 마하 선생의 시를 썼다.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첫째, 붓끝이 날카롭고 예리해야 하며, 둘째는 굽은 털이 없이 가지런히 정돈될 것이며 셋째는 원윤(圓潤)으로 먹물을 풍부하게 머금어 획에 윤기를 더해줄 수 있어야 한다. 넷째는 곧으면서 탄력성이 있어야 한다. 붓을 제작함에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며, 붓의 모든 것을 이해함을 이른다.
지필묵에 대해 내가 뭘 알겠냐만 할아버지 덕분에 항상 지필묵을 곁에 두고 본 사람으로서 서예가 예술이라면 그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는 요소 중에 지필묵의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지 같은 경우 한지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예술성을 부여한다. 하물며 그 한지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글씨와 산수의 풍경을 담은 먹의 농담이 더해진다면 어떠하겠는가?
내가 글씨 쓰는 분들과 수묵화를 그리는 분들에게 존경의 염을 보내며 그들을 예술가로 대접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글씨와 그림으로 표현하는 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가산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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