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和 北山道人북산도인의 시에 화운하다.
艸衣禪師초의선사
詩書六藝具精通 시서육예구정통 文采雙全曉日紅 문채쌍전효일홍 北老詞華繁玉露 북로사화번옥로 晶翁神氣濯淸風 정옹신기탁청풍 黃花宿約時將近 황화숙약시장근 明月佳氣已半空 명월가기이반공 靜掃明窓常獨坐 정소명창상독좌 秋山蒼翠冷烟中 추수창취냉연중
시서와 육예를 고루 갖춰 정통하고, 문채 또한 일출 태양처럼 온전하다. 북로의 글 솜씨는 옥구슬이 매달린 듯하고, 정옹의 신기는 맑은 바람으로 씻은 듯하네. 국화시절 약속은 장차 가까이 다가오고, 명월은 밝은 기운으로 이미 하늘에 둥두렸하네. 마음을 가다듬고 창가에 홀로 앉으니, 가을 산은 차가운 연무 중에 푸른빛을 발하네.
*晶翁 정양도인 신태희를 말하는 듯
가산 김부식 선생의 문자향이 바람을 타고 이곳 면목동에 당도했다. 북로의 글 솜씨가 옥구슬에 매달린 듯 하다면 가산 선생의 글 솜씨는 모지락스럽고 강팔진 세상의 바람에 깎이고 깎여 해탈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글씨에 대해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에게도 편안한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뜻이다. 편하다고 해서 격이 떨어진다는 게 아니라 글씨 속에 대중과 호흡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는 얘기다.
아무리 시서와 육예를 고루 갖춰 정통하고 문채 또한 일출 태양처럼 온전하면 뭐할 건가? 문장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독자 없는 문장이 뭔 소용이겠으며, 아무리 그림이 걸출하다 해도 “아아”해가며 감탄해 줄 이 없는 그림은 파도 한 방이면 사라질 모래 위의 그림과 같기에 하는 말이다. 열두 이랑 깨꽃 콩꽃이 농부의 눈길로 자란다지만 서예가의 글씨 역시 감상자의 눈길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어떤 글씨 쓰는 이가 내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글씨와 그림도 함께 감상하면 좋지 않겠나?“
내가 말했다. “나는 책을 읽어도 책상 위에 두 세 권 책을 함께 펼쳐놓고 못 읽는다. 글씨나 그림에 대한 소양이 충분하다면 가능한 일이겠으나 이제 안목을 키우는 사람이다. 해서, 공부의 교과서로 일목 선생의 그림과 가산 선생의 글씨를 선택했을 뿐이다. 두 분께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감상자로서의 권리도 있으니 두 분도 지켜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두 분 작가의 글씨나 그림에 천착하는 이유가 그렇다.”
추사의 책을 사서 읽으며 때로는 집에서 가까운 교보문고 건대점에 쪼그리고 앉아 관련 책들을 읽어보는 요즈음 글씨와 그림의 아름다움이 이제 막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전남대학교 박구용 교수의 유투브 미학강의를 통해 배우는 바도 많다. 특히 그림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차피 뉴스콕 http://www.newskok.com/sub.html?section=sc23 에 기사를 보내는 뜻이 “나는 이렇게 글씨와 그림을 감상합니다.”라는 어떤 방법론을 공유하고자 하는데 있으니 오늘은 글씨 얘기보다 그동안의 <그림에 썰을 그리다>에 기사를 보내온 소회를 밝힌다. 두 분 작가의 글씨와 그림, 그리고 뉴스콕 덕분에 많은 공부를 했다. 글씨와 그림에 대한 안목이 높아짐에 따라 어느 고서에서 읽었던 글씨가 꽤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다섯 이랑 대竹를 심고 다섯 이랑 채소를 심어 반나절은 책을 읽고 반나절은 고요히 앉아 있다.“
정약용 또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논 열마지기가 있다면 반은 연蓮을 심고 반은 벼를 심어라. 벼는 몸을 살찌우고 연蓮은 마음을 살찌울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연蓮을 심거나 대竹를 심을 땅이 없으니 가산 선생의 글씨와 일목 선생의 그림을 대竹와 연蓮 대신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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