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확인하는 작업!
2023년 1월 16일
대 매화 소나무 그림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뭘 알아서 좋아한다기보다 고향에서 늘 보아오던 풍경이기에 익숙해서 그렇다. 회사에도 십 미터가 훌쩍 넘는 구불구불한 소나무 스무 그루가 있고 홍매화 황매화가 곳곳에 있으며 담은 대나무로 빙 둘러쳐 있다.
이번 백영란 선생의 대 그림을 보며 반가웠다. 늦은 봄 회사의 대숲에 새로 올라온 어린 대를 보는 것 같았다. 또한, 포스팅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나를 확인하는 작업”
나를 확인하는 작업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되지 않겠나! 대 그림을 그리며 백영란 선생은 한 남자의 아내 이전에 어머니 또는 며느리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고자 했다.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가 숨어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림 속에서 이야기를 못 찾으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이야기를 만든다. 그러면서 작가와 소통을 한다.
아아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시다. 모니터의 글씨가 두 겹 세 겹으로 보인다. 눈이 많아 안 좋아졌다. 백 선생의 대 그림을 크게 확대해놓고 감상을 하는데 아른아른하다. 그림의 대가 멀리 대숲을 바라보는 것 같다. 바람 소리에 댓잎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흥이 올랐으니 그냥 가기 서운해 詩佛 왕유가 황산의 대숲에 앉아 지었다는 시 한 수 첨부한다. 왕유의 시 한 수로 황산 대숲은 명소가 되었다는데,
홀로 대나무 숲에 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길게 휘파람을 분다 남들은 모르는 깊은 숲 밝은 달이 나를 찾아 비추는구나 볼품없는 내 고향, 하지만
*一木 白榮蘭 전 <스며드는 먹의 향>
내 고향은 강원도 홍천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쉬엄쉬엄 가도 두 시간이면 넉넉한 거리에 있는 고향이지요. 철마다, 달마다 다녀오는 고향이면서 가슴속에는 항상 고향이이라는 그 무엇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흔히들 고향을 얘기할 때 ‘어머니의 품 같은’ 수식어가 붙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어머니의 따듯한 품에서 키워진 곳이 바로 그곳이라서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고향에는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그 어떤 하소연을 해도 끝까지 웃으며 들어줄 수 있는 어릴 적 동무들이 있고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따듯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지요.
타관생활 50년, 즐거운 날보다는 서러운 날이 많아 하늘에 달조차 있는지 모르고 살아왔습니다만 그 서러운 마음을 안고 고향을 가면 동구 밖 멋들어지게 굽은 소나무와 키 큰 장승은 타관에서 묻어오는 억만 시름 고향 땅에 발 들여놓지 못하도록 수호신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고향 집 툇마루에 앉아 열무김치에 밥 한술 말아 먹는 서러움 속에서도 어김없이 밤하늘에 달은 떠서 도심의 가난에 길들여진 나를 위쪽으로 하는 곳이 바로 고향입니다. 그리고 연어가 바다로 나갔다가 저 태어난 곳으로 와서 생을 마감하듯이 나 죽어 묻힐 도라지꽃 파랗게 물드는 땅이 고향에는 있습니다.
발밑에 낙엽이 뒹굴고 낙엽 속에 파묻힌 ‘신용불량자 긴급대출’ 이라 쓰인 전단지가 미화원 아저씨의 쓰레받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청포도마저 다 떨어지고 없을 이 몹쓸 계절에 문득 고향 생각으로 진저리를 칩니다. 내 고향은 인제에서 서울로 되짚어 오는 길목에 있는 청포도 익어가는 마을 홍천입니다.
집 밖을 나서면 우거진 숲이 있는 것도 아니요 먼지 풀풀 날리는, 딱히 내세울 것 없는 볼품없는 고향 풍경이지만, 우물가에 앵두나무가 있고 뒤란에 청포도가 익어간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흡족한 고향입니다.
내 고향 풍경은, 대개 일목 백영란 선생의 그림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동안 ‘조상연의 그림에 썰을 그리다’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곧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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