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詩한 시 한 편 - 꽃이 운다면

편집팀 | 기사입력 2023/10/24 [08:29]

時詩한 시 한 편 - 꽃이 운다면

편집팀 | 입력 : 2023/10/24 [08:29]

꽃이 운다면

 

                              / 손남숙

 

어느 집 슬레이트 지붕 골짜기로 흘러 내려오는 붉음 같겠지

박태기는 선명한 분홍색을 핏물처럼 빼내는 중이었어

빈집 꼭대기 위로 올라가 하염없이

머나먼 길을 돌아온 어느 자식의 긴 밤을 같이 보내려던 것이었지

마침 곁에는 밤새 엿듣는 나무가 있었어

벚나무는 우연히 흘러 들어온 방랑객처럼 그 집 마당 구석에 서 있었지 뭔가

운명처럼 서로를 맞대 보는 날도 있는 거지

 

봄날에 먼저 쏟아지는 건 벚꽃이야

흩날리며 제 울음을 바삭하게 말려 보내면

옆에서 가만히 들어 주던 박태기가 별안간 깜짝 놀랄 분홍색을 만들어

슬그머니 금이 간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꽃들의 눈물이 배어 들어가

눈물은 천장을 타고 무너져 가는 서까래 밑으로 떨어지겠지

삐걱거리던 마루는 다 뜯겨 나가고 없어

꽃잎들이 낱낱이 듣고 새기던 나날은 우묵한 먼지와 같이 쌓였겠지

 

희고 붉은 꽃들이 떨어지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 마당에

커다란 우물 같은 눈망울이 생겨나

그렁그렁 맺히는 사월을 누가 알까

꽃이 운다면 저와 같겠지

색이 없는 마디에서 색이 돋고

가지마다 향기로운 길을 열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네

빈집에 나무와 나무만이 서로 울어 준다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