彈劾의 강을 건넜다..그러나 다시 그 강을 건너야 우리의 피안이 있을 지 모른다. 다시 바람이 분다. 비릿한 강을 품은 바다의 부름이 인다. 기억의 한계는 없다. 우리가 놓지 않는 한....
.........스무 여섯 번 째 마지막 이야기
/탄핵(彈劾)
이렇듯 무녀의 농단사술이 하나 둘 벗겨져 세상에 드러나는데도 여왕과 무녀는 희희낙락 백성들을 조롱하며 모르쇠로 일관하자 드디어 여의회의 검객들이 들고 일어나 왕을 탄핵 해버렸다. 왕의 옷을 벗겨버린 것이다. 새눌의 검자들도 여럿이 담을 넘어 이를 도모했다. 여왕의 장래가 헌재(憲裁)로 넘어간 것이다. 헌재는 성균관 가기 전 재동골에 있었다.
그래도 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술을 외며 조까술을 부렸다. 아직도 뭐가 뭔 줄을 모르고 있었으며 여왕뿐만 아니라 도승지를 비롯한 승정원 등 궁의 가신들이 모두 그랬다. 단 하나의 충신(忠信) 충언(忠言)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궁은 황폐하고 피폐해져 있었다.
이런 시간들이 속수무책으로 흘러 여의회(汝矣會)의 탄핵이 헌재(憲栽)에서 판결난 날은 계종 오년 정유(丁酉)년 이월 열 사흗날 양력 삼월 십삼일 이었는데, 헌재는 이날 여왕을 파면(罷免) 해버렸다. 그러면서 한마디로 ‘나쁘고 한심한 년’ 이라고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헌재 문 앞에서 어벙이와 음마들이 차라리 제 목을 쳐달라고 난리를 쳐댔으나 실제로 목을 내놓는 위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그런 것은 그러거나 말거나 였다. 그날 법대(法臺)의 높은 곳에 앉아 이를 판관(判官) 전원일치(全員一致)로 선고(宣告)한 판관은 여인판관 정정(訂正)이였는데, 그날 아침 정정은 앞머리에 핑크빛 롤 장미를 돌돌 말고 나타나 여왕과 일당들을 돌돌 말아버릴 것을 암시했다. 견민상수가 바빠졌다.
여왕이 파면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궁에서 꼼짝을 않고 개김술을 펼치자 무림의 움직임이 다시 광화문에 어른거리자 왕은 바로 다음날 저녁 야음(夜陰)을 틈타 아리수 넘어 봉은사(奉恩寺) 앞 삼별로 들었다. 몇 일후 모든 언론은 이곳을 삼별택이라 통일해 불렀다. 왕의 검은 가마가 삼별 앞에 이르자 골통(骨通)들과 취한 어벙이와 음마들이 마마를 허공에 외쳐대며 울고불고 지랄술을 펼치며 나리나리 개나리를 크게 외쳐댔으나 이 또한 눈물도 흐르지 않는 빈 공술(空術)이어서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했으며 이들 일당들을 골빈당(骨貧黨) 또는 잔당(殘黨)의 무리라 가엾게 여겨 불러치웠다.
계종이 탄핵 파면되어 사저로 쫓겨 나온 지 한 달 여 흐른 정유(丁酉)년 춘 삼월 초나흗날 축시(丑時)가 막 지난 인시(寅時) 초 삼분. 양력 사월 삼십 일일 새벽 세시 삼분. 대개 역사적 사건들의 시간들이 이렇게 절묘하듯 드디어 계종이 구속(拘束),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나라가 소란스럽고 그녀로 인해 날로 시끄럽고 백성의 일상이 귀찮아지고 짜증이 더하니 그를 강 건너 조용하고 고적한 곳으로 보내 쉬게 하라는 구속영장(拘束令狀)이 떨어진 것이다. 사헌부(司憲府)의 판관 부영이 이를 발부했는데 부영은 탐라(耽羅) 출신의 판관 이었다.
아비 희종이 수병(海兵)을 앞세워 권좌를 탈취하려 아리수 다리를 넘어오던 그 여명의 시간에 그의 딸 계종은 권좌를 잃고 다리를 거꾸로 건너 내려간 것이다.
강을 건너 태령(泰嶺)을 넘어 가천(加川)을 지난 계종의 가마가 이른 곳은 이왕골에 있는 포일대옥(大獄) 이었다. 여왕이 하옥(下獄) 된 것이다. 그녀가 새벽에 들이닥쳤지만 옥리(獄吏)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올 줄 알았기에 진즉 대비를 소홀하지 않았던 터였다. 다만 골당의 노비들만이 빈 곡소리의 목청을 높여 충성을 과시했고 여왕의 친위 사모대가 삭발을 하며 눈물을 찍어내기 바빴지만 론통(論通)의 서기(書記)들과 그림통들은 바삐 써대고 찍어대기 무심히 바빴다.
하지만 통탄할 것은 이 어두운 새벽에 이르기까지 궐내의 어느 승지(承旨) 내시(內侍) 하나 목을 꺾는 놈이 없었고 올라가 도승지나 판서 참판 같은 당상(堂上)의 높은 자리에서 여왕에 빨대를 꽂기에 굳건했던 어느 놈 하나 할복(割腹)으로 항거 자진하는 놈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시늉하는 놈도 하나 없었다. 백성들은 이를 더 이상하게 여기며 혀를 끌끌찼다. 여왕의 패거리들은 그 중에서도 영의정(領議政) 고환(睾丸)을 특히 더욱 씹어댔는데, 여왕의 은총으로 형조판서를 거쳐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오른 그야말로 분연히 또는 교활하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랐으나 그러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백성들이야 고환의 흉중을 어찌 알 수가 있었겠는가. 고환은 이때 새로 금시계를 만들며 새로운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고환인들 일인상(一人上)의 맛을 모르겠는가.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아는 법.
다만 백성들만 표정이 굳어져 갔으며 중심을 잡기에 안간힘을 썼다. 나라가 걱정된 것이다.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먹고 살기에 바빠 안심하고 나라를 맡겨 놓기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다만 가까운 훗날의 사가(史家)들은 그녀가 그래도 혼신으로 애를 써 심정을 다 한 몇 가지가 있어 그 중 두어 개를 꼽아 적어 두었는데 그 하나가 그녀의 깊은 효심이다, 여왕은 즉위에 올라 와궁(瓦宮)에 들자마자 와신상담 흉중에 갈아 담아 두었던 부왕의 복권을 위한 계책을 실행하기에 공력을 다해 은밀하게 호시탐탐 했다.
여왕이 준비해 궁으로 가지고 들어온 계책 중 하나는 사초(史草)를 뜯어 고치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그녀는 먼저 국교서 개편을 마음에 굳게 다잡고 백성들의 시야를 최면(催眠)한 후 부왕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 예부(禮部)에 별과(別科)를 설치하고 궁에서 멀리 둥지를 만들어 밤으로만, 밤으로만 터를 잡아나갔던 것이다. 아비를 향한 일편단심의 효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여왕의 치맛자락이 밟히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이를 몰라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왜라면 이(齒)를 부드득 갈아대는 백성들의 원혼이 남아도는 터에 왜를 감싸 안아 적당하게 눈감아 주려했으니 과연 그 일이 가당키나 할 일인가. 아비의 얼굴에 묻은 검불을 털어내려 만백성의 얼굴을 짓밟아 보려 했던 것이었다.
이 외에도 사가들이 적어놓은 사초에는 레이져 뽕, 황금 매화틀, 육중한 트레머리, 사방 유리거울, 사법의 등을 쳐 왜 살리기 등 여러 가지가 많고 많이 있었으나 그것들을 여기에 다 올리기에는 너무 그래서, 그래도 가오있는 백성들은 차마 이를 옮기지를 저어하는 것이다.
이상스럽게 왜(倭)와 연결이 되는 정유년. 이월에 여왕의 시대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애련이 오공삼녀(503)가 된 것이다. 처연한 나라의 안쓰러운 한 시대가 갔다. -끝-
독자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 지금까지 무무당 김춘성 작가의 계종야록(鷄宗野錄)을 사랑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이어졌던 계종야록(鷄宗野錄)이 26편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당사의 사정으로 잠시 중단되었기도 했지만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과거로 부터 현재를 알고 미래에 밝은 역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가 시작 되었습니다. 지금, 암울했던 그 때의 상처가 아물고 밝은 미래를 논할 수 있는 때가 되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강을 건너 보았기에 강둑에 앉아서 더 냉철하게 사고는 할 수 있겠지요. 무무당 김춘성 작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독자들께 더 좋은 작품으로 본 지면이 아름다워 질 수 있도록 곧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잘 이겨내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뉴스콕 편집부 드림
추신 : 5월22일 일요일 전편을 올립니다. 흐름을 놓치신 분들은 다시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저작권자 ⓒ 뉴스콕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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